제목 : [이우상 문화칼럼] 계성학교 개교 100주년을 축하함 등록일 : 2006-09-26    조회: 929
작성자 : 김창수 첨부파일:
[이우상 문화칼럼] 계성학교 개교 100주년을 축하함
영남일보 2006-09-26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壁上)의 괘종(掛鐘)을 들어보소.

한 소리 두 소리 가고 못 오니 인생의 백년가기 주마(走馬) 같도다.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 나고

낙락장송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되네.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새벽달이 넘어가고 동천조일(東天朝日) 비쳐든다.


1900년대 초, 배움의 갈증에 헉헉대던 청년들의 가슴을 쾅쾅 울리던 개화기 창가가사 ′권학가′다. 달리 ′학도가′라고도 한다. 일제 강점과 개화의 쓰나미가 동시에 밀어닥치던 시점이다. 열악하고 유치하나 의욕적인 신교육의 싹이 움튼 발화점이다.

1906년을 개교 원년으로 삼는 학교가 유난히 많다. 보성, 양정, 휘문, 중동, 한강 이남에는 향토, 대구에 계성학교가 문을 열었다. 100년을 자축하는 행사가 무성하다. 개인사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지만 국가와 민족의 역사는 무궁하다. 100년 세월을 거뜬히 버텨온 계성학교의 연륜을 축하한다. 거기 인연 닿은 이들만 자축할 역사가 아니다.

한국 근대사의 뿌리도 이제 내세울만하다. 굳이 단군 할아버지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곡절과 질곡은 덮어두고, 지역사회는 물론 한반도의 이름으로 축하에 인색하지 말자. 한 세기의 단위가 100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강산이 열 번 변한 시간이 100년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짧은 호흡에 익숙해졌다. 내일에 대한 보장과 확신이 없는 격변과 디지털이란 낯선 문화가 단호흡에 일조했다. 100년은 고사하고 10년의 약속에도 익숙하지 않다. 전세 계약이 2년으로 늘어난 게 오래지 않다. 내일이란 단어를 모르고 사는 하루살이와 크게 다르지않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따분한 행사 때 부르는 노래 가사일 뿐 장구한 시간은 나와 무관한 일로 여겼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란 말이 공허한 구호인 줄 알았다. 호사가들의 언술로만 여겼다. 100년이 실현된다는 확신 없는 세월을 살았다. 100년은 추상이자 관념이었다. 인지 능력의 한계로만 여겼다. 숫자의 희롱으로 생각했다. 역사책에 나오는 기호인 줄 알았다.

계성학교의 100년은 그래서 대견하다. 바다 너머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우리 곁에 일어난 실제상황이다. 계성학교가 끼친 공과는 논외로 하고 100년 전부터 여기까지 이어온 명맥이 장하다. 마을에 백수(白壽) 노인이 탄생한 것보다 더 큰 영광이다.

100년을 향해 달려가는 학교들이 많다. 건강하고 활기차게 레이스를 이어가길 기원한다. 상대가 넘어지길 바라는 용렬함이 끼어들 이유가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에 오르는 이들처럼 낯선 얼굴일지라도 서로 격려의 말을 던지자. ′태산에 오른 자는 다른 산은 산 같이 보이지 않고 바다를 본 자는 다른 물이 물 같이 보이지 않는다.′ 공자의 말이다. 백년을 본 자는 천년을 생각할 줄 안다.

짧은 호흡이 미덕인 줄 알고 살아온 세월을 반성하며 넓고 먼 세상을 본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계성학교 교가의 한 구절은 이렇다.

′햇빛과 같은 너의 광채를 세상에 비춰라 영원무궁 비춰라~ 우리의 자랑인 계성아!′

내 자식, 남의 자식 따지지 않고 배움에 목말라하는 청년들에게 등 두드려주고 따쓴 밥 한 그릇 먹이던 개화기 정신을 되살리자. 10월13일, 친소(親疎), 원근(遠近)을 따지지 말고 떡 한 시루, 막걸리 한 통 들고 가서 계성학교 100주년을 축하하세. (*)

(대진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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